Cherryhill Baptist Church 체리힐 한인 침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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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 설교

부끄럽지 않은 복음 (롬 1:14-17)

1/10/2021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14-17)

왜 바울은 많은 표현 중에 ‘부끄럽다’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이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은혜롭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이지만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미련해 보이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죠.

바울이 살던 그 당시에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입니다. 이 두 부류에게 복음은 모두 인정받지 못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전 1:22-23)
 
  여기에는 대 사람들의 특징과 이방인들의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적’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찾는 것은 무엇이죠? ‘지혜’입니다. 먼저 헬라 사람들이 추구했던 ‘지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리석은 복음(헬라: 이성의 길)
  그 당시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이성’과 ‘지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성을 생각해서 온갖 지식을 개발시키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헬라 사람들은 이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비이성’적인 것, ‘초현실’적인 것 곧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비웃고, 냉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던 중에 ‘아덴’이란 지역에 방문합니다. 우리가 ‘아테네’라고 알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아테네는 지금 그리스 나라의 수도이며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습니다. 온갖 이성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그 곳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변론하였는데 그 대상에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 당시 철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죠.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가장 새로운 것’에 있었어요. 누가 가장 최신의 지식을 말해주는가? 누가 가장 이성을 잘 사용하여 새로운 철학을 말하는가? 그것이 그들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같이 행 17장 31-3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에 관해서 당신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행 17:31-32, 새번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분이 만 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헬라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이성을 통해 생각하고, 합리적인 길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사람이 죽고, 부활했다는 소식은 어리석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동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들의 이성을 제일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요즘 시대는 ‘과학 만능주의’ 시대라고 하죠. 이성과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학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사건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과학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인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과학의 시선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만약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다면 그 분은 과학을 만든 분이 아니겠습니까? 과학보다 큰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이 과학 안에 갇혀 계신 분이십니까? 과학으로 그 분을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거리끼는 복음(유대인: 표적의 길)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전 1:22-23, 새번역)
 
그렇다면 유대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기적’과 ‘표적’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은 홍해가 갈라지거나, 여리고 성이 무너지거나, 병든 자가 낫는 것 등을 경험했기에 이성적인 것을 넘어 그러한 표적들을 추구하였던 사람들이었죠.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겠다’ 이는 하나님 그 자체 보다도 ‘기적’을 더욱 중시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십자가
  이 두 부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처음에 예수님은 두 부류 모두에게 아주 매력적인 분이셨습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헬라엔에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지혜의 말씀은 지금껏 그들이 알아왔던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지혜를 담은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은 하늘의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들을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오랜 로마의 압제 속에 있던 자신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으셨을 때 이 두 부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엄청난 웅변 기술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많은 군중들을 동원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성을 추구하는 헬라인들이 보기에 많은 능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허무맹랑한 말에 불과했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무력하게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자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표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메시야가 맥없이 죽어버린 것이죠.
 
  그렇게 유대인, 헬라인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은 세상에서 보기에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무능함과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할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상대방이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때,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죠. 그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 1:15)
 
  십자가의 도, 즉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과학이나 이성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에 미련해 보이는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가요? 주님께서 묵묵하게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이 우리가 진정 걸어야 할 길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십자가의 길의 능력이면, 그 부활의 능력이면 충분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해보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거리끼고 미련해 보이는 그 복음이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로마 세계를 전복시키고 온 세계의 왕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 속한 엄청난 지혜와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걷기보다 낮아지고, 비참해지고, 고난당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온 인류를 죄로부터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우리가 먼저 체험해야 할 능력이며, 또한 갚아나가야 할 빚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해 ‘빚진 자로서의 의무감’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 이전에 복음 그 자체로서 우리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할 수 있는대로’ 복음답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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